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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EL-Safe

승안원 공창석 원장 특별 기고

 

‘근초고왕 해양왕국 백제를 세우다’ 3편

서해 바다를 제패하다

 

근초고왕 말기에 백제의 위상과 자긍심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것은 백제를 훨씬 능가하는 고구려와 싸워 승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싸움은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먼저 도발한 전쟁이다. 본래 백제와 고구려는 추모왕(鄒牟王) 주몽을 조상으로 함께 섬겼다.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국경이 맞닿게 되자 독립국가로서 치열한 경쟁자가 되었다.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과 서해 해상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국면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국원왕의 도발과 근초고왕의 맨손 퇴각, 숨겨진 진실은?

고국원왕이 먼저 백제에 도발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국원왕은 342년 모용황(慕容)의 침략을 받아 패배하여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한다. 절치부심 때를 기다리다가 모용황의 세력이 약화되자, 요동 쪽의 방비를 풀고, 마침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백제를 억누르고 제압하기 위해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드디어 369년에 고국원왕이 직접 기병과 보병 2만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치양(雉壤)에 주둔했다.1)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을 치려면 지금의 하남 쪽으로 진군해야 하는데, 왜 완전히 다른 쪽인 치양인가? 치양은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 지역으로 한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화만에 접해있다. 그러니까 치양은 한강을 드나드는 배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백제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곳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노리는 목적은 뻔히 드려난다. 백제의 무역선의 통행을 훼방 놓고는 장차 서해 제해권을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근초고왕은 즉각 태자를 치양으로 급파했다. 태자는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5천 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대패한 고국원왕은 평양성으로 퇴각했다.2) 고국원왕의 실력을 간파한 근초고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그로부터 2년 뒤 371년이다. 근초고왕이 직접 정예군 3만명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평양성을 쳤고, 고국원왕은 성을 지키며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근초고왕은 더 몰아붙이지 않고 물려났다.3) 왜 그랬을까? 적을 외통수 궁지에 몰아넣고 최후의 일격만 남은 상황에서의 퇴각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어색하다. 또 퇴각하는 근초고왕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국력을 총동원한 3만의 정예군을 투입한 전쟁에서 전세가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섰다. 지금까지 기존의 학계는 고구려군의 성문을 닫아 건 필사항전과 백제군의 쌓인 피로 따위를 고려한 퇴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전리품 하나 없는 맨손의 퇴각을 과연 군사들과 백성들이 순순히 납득할 수 있을까? 따라서 퇴각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근초고왕의 평양성 침공의 의미

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의 전쟁을 땅따먹기라는 식으로 보면 안 된다. 영토 분쟁이라면 고국원왕을 죽인 차제에 무리수를 써서라도 평양성을 함락하고 대동강 영역을 점령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를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고도 마지막 급소를 치지 않고 자비를 베풀듯이 깨끗이 물려났다. 그것은 백제가 고구려와의 영토분쟁은 가급적 피하고, 일정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자국의 영역을 유지한다는 기본 입장이 서 있는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토 문제가 전쟁의 원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백제-고구려의 전쟁은 서해 바다의 제해권을 건 싸움이었다. 도전은 고구려가 먼저 걸었다. 그 이유는 백제가 순식간에 요서를 점령하고 뒤이어 남해연안 소국들을 병합할 뿐만 아니라, 왜국까지 휘하에 넣고 고구려 앞 바다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며 무역을 전개하니, 뿔이 나서 이를 방해하려한 것이다. 하지만 치양 전투에서 패하고,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까지 죽으니 완벽히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림 1] 한반도와 발해만의 해류도

한편 근초고왕의 평양성 침공은 꼭 평양성을 탈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고구려로부터 서해 제해권을 확실히 담보 받으려 한 것이었다.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고구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백제의 서해 제해권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은 전리품으로 서해 제해권을 획득한데 비해 고국원왕은 우리 역사상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은 유일한 임금으로 이름을 남겼다.


평양성에서 승리한 371년은 근초고왕이 서해안 제해권을 사실상 장악한 해이다. 당시 5호 16국 시대에 중국 화북지역을 지배한 종족들은 전부 유목민족 출신으로 해양무역이나 해전에는 사실상 까막눈이었다. 고구려 또한 주력군이 궤멸한 상태에서 바닷길을 놓고 백제와 싸울 힘이 없었다. 백제의 서해 해상권 장악으로 백제의 상인과 무역선은 발해만과 산동반도를 비롯한 중국 동북해안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한산 천도와 새로운 왕성 축성

근초고왕은 평양성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뒤, 곧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4) 이 천도와 한산의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기존의 연구는 거의 모두 고구려의 침공 대비, 왕권 다툼의 종식, 또는 정치세력의 재편 따위의 정치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5) 또는 도읍을 실제로 옮긴 것이 아니라 한산을 왕도로 확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6) 근초고왕의 천도가 왕권의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무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근초고왕의 천도는 더 폭넓은 시각, 즉 ‘원대한 식견’에 따른 준비된 천도라고 보는 게 필요하다. 우선 평양성에서 이기고 돌아오자마자 곧 바로 천도한다는 것은 이미 준비가 끝나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근초고왕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리 차근차근 천도를 준비해 왔고, 이때에 이르러 승전의 축하무드를 살리며 천도 행사를 거대하게 치른 것이다.


다음 한산으로 천도한 목적이다. 근초고왕의 천도를 고구려의 침공 대비, 왕위 계승권의 확보 따위의 좁은 시야로 보면 근초고왕의 진면목을 놓친다. 근초고왕의 천도는 새로운 백제를 만방에 알리는 선포였고, 강력한 정복국가로서의 위상을 치켜세우는 한 차원 높은 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백제는 강국에 걸 맞는 웅장한 도성을 가져야 했고, 중국·가야·일본 등의 사신들에게 도성의 위용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또 정복과 대외교역의 신장에 따른 도시경제기반의 확충이 시급했고, 이에 수반되어 늘어나는 도성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도성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새 도성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국제화의 길을 개척함에 따른 수요이다. 백제의 요서경략과 가야·일본으로의 본격적인 진출은 그들 지역으로부터 유민이 흘려들어오고 색다른 문물도 유입되었다. 이에 국제화로 인한 수요를 해소할 도시공간이 필요해지자, 근초고왕은 새 도성을 통해 이를 발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백제는 7세기 초에 국제화의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이는 『북사(北史)』의 “백제에는 신라·고구려·왜국의 사람들을 비롯해 중국인들이 섞여 살았다.” 7)라는 기록이 뒷받침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근초고왕은 한반도에 최초로 국제화의 서막을 연 왕으로 자리매김 해도 좋으리라. 그러면 한산의 위치는 어디일까? 현재 한강 유역의 백제성 유지는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이 남아 있다. 몽촌토성이 뒤에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근초고왕이 백제의 위상에 맞는 새로운 왕성으로 몽촌토성을 축성하고 왕실과 지배층이 옮겨간 것이다.8) 왕궁이 옮겨간 뒤의 풍납리토성은 무역과 상업의 도시로 발전해 간 것으로 보인다.

 

 

낙랑태수 책봉의 숨은 뜻


근초고왕은 평양성에서 귀환한 뒤, 372년 정월에 중국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9) 일본에는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했다. 아마도 칠지도 하사는 일본의 승전 축하사절에 대한 답례였을 수도 있다.10) 동진은 동년 6월에 백제에 답례 사신을 보내 근초고왕을 진동장군령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로 책봉하는 격식을 차렸다.11) 이 책봉 의례에서 낙랑태수라는 지칭이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는 ‘조공과 책봉’이란 용어에 천착하여 단순히 정치적으로 백제가 동진에 사대의 예를 차린 것으로 치부하고, 낙랑태수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낙랑태수에는 심대한 의미가 담겨있다.

 

낙랑태수 책봉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백제 사신이 타고 간 배와 이용한 항로를 규명하는 것과 사신을 보낸 진짜 목적을 파악하는 문제이다. 우선 백제 사신은 백제선, 동진 사신은 동진의 배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항로는 어떤가? 백제선은 정월에 출항하여 6월에 돌아왔다. 당시 동진의 수도는 건업(建業)으로 지금의 남경이었다. 그러므로 백제 사신은 지금의 서울에서 남경까지의 왕복에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이 6개월은 연안 항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불가능한 여정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직항로가 개설되었고, 나아가 한반도와 남중국을 잇는 사단항로까지 개설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 가능하다.


 

[그림 2] 근초고왕의 백제권역 확장

산동반도로 직항하는 서해횡단항로의 경우 서해 해로 약 1,100리, 등주에서 동진의 수도 건업(建業, 지금의 남경)까지 약 1,900리로서 총 약 3,000리이다. 서해를 배로 건너는데 약 10일, 육로는 하루 50여리를 걷는다고 보면 38일이 소요되어 총 약48일이 걸린다. 왕복 약 96일의 여정이다. 따라서 백제의 한성에서 동진의 건업에 가는 여정은 쉼 없이 가도 100여일이 걸린다. 그러므로 적당한 휴식과 건업에서의 공무상 체류를 감안하면 6개월은 적절한 시일인 것이다. 물론 남중국 사단항로라면 시일은 단축될 것이다. 따라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이때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오가는 서해횡단항로는 이미 널리 이용되고 있었고, 나아가 남중국 사단항로가 백제에 의해 개설되었을 것으로도 추측 가능하다.


다음 백제가 동진에 사신을 보낸 목적이다. 이에는 통상적인 ‘조공과 책봉’이라는 등식으로는 설명이 궁색하다. 『삼국사기』에 조공(朝貢) 기록이 있다 해서 근초고왕이 동진에 굴신하고 공물을 갖다 바쳤다는 따위의
사대주의 관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중국은 5호16국 시대로서 절대강자가 없었다. 이익을 다투면 적이요, 상호 도움이 되면 친구였다.

 

 

백제가 흉노 등의 북방 호족(胡族)에 밀려

장강 아래로 도망한 처지의 동진에게 정치적으로 아부하고 크게 도움 받아야 할 일도 없다. 따라서 근초고왕이 사신을 보내 동진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한 것은 동진이 전진(前秦)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동진이 백제가 필
요하듯이 백제는 요서 식민지의 배후로서 동진이 유용하므로 이 국제정치상황을 유리하게 타개해 가려는 외교적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남중국과의 교역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려 한 것은 확실하다.


백제 사신에 대한 동진의 책봉 답례가 예사롭지 않다. 마치 미리 짜놓은 듯이, 또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나 신속했다. 대국과 신하국 사이의 ‘조공과 책봉’과는 완연히 다르고, 동진의 발 빠른 답례에 갑의 입장에 선백제의 우월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다.


따라서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자 곧 동진에 사신을 보낸 것은 백제의 위상을 과시하고 동진의 외교협력을 끌어내려는 목적이었다. 근초고왕은 그동안 백제가 이룩한 업적, 즉 요서에 식민지를 설치한 것과 한반도 남해 연안을 병합하고 일본을 휘하에 넣은 사실 그리고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승리한 사실 등을 동진에 알린 것이다. 아울러 서해와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을 완전히 제패한 것을 통보하고 백제의 제해권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또 하나 백제가 경영하고 있는 요서 진평군 식민지를 추인하고 양국의 교역, 구체적으로는 요서 상품을 동진에서 수입해 주는 따위의 협력을 타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낙랑태수라는 책봉 명칭은 동진이 백제가 옛 낙랑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낙랑태수 책봉은 동진이 백제의 서해 제해권을 확인해 주는 것과 나아가 백제가 요서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근초고왕은 한강 이남의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고 서해를 백제의 ‘내해’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요서 식민지를 경영하여 북방 산물을 확보하고, 일본을 휘하에 끌어들여 교역권을 넓혔으며, 동진을 교역 파트너로 삼아 남중국과의 교역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그리하여 역사상 최초로 한·중·일을 엮는 동아시아 해양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백제 상인은 이제 한·중·일의 어디든지 진출해 나갈 수 있게 됐다.


근초고왕이 일군 거대한 해양경제권은 우리 민족사에서 다시 보기 힘든 명장면이다. 백제 상인은 ‘해양제국 백제’의 주인으로서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백제의 해양 자부심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혼으로 전승되고 있다. 근초고왕의 위상은 천하에 드높이 올랐다. 그는 교역에서 얻은 이득을 문화와 문물의 발전에 쏟아 부었고,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우뚝 섰다. 이 모든 것은 실로 근초고왕의 ‘원대한 식견’의 발현이며 청사에 길이 남는 근초고왕의 위대한 업적이다. 이제 우리는 근초고왕을 동아시아 해양을 제패한 ‘바다의 제왕(帝王)’이라고 불려야 한다.

 

[참고문헌]
1)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 9월조.
2)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 9월조.
3)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조.
4)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조.
5) 김기섭, 「백제전기의 한성에 대한 재검토」,『향토 서울』 55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5,
P.24-28.
6) 전우식, 「백제 근초고왕대 ‘이도한산’ 기사의 해석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40집, 2005,
P.58,68.
7) 『북사(北史)』권94, 열전82, 백제. “其人雜有 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8) 김기섭, 앞의 책, p.39
9)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7년 조.
10) 칠지도는 아름답고 멋있는 칼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칠지도로 부른다. 전체 길이가 74.9cm이고 칼의 양면에 60여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
다. 그 내용은 백제가 제후국인 왜왕에게 주려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칠지도의 6개 가지는
백제의 6개 제후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 가야, 탐라(제주도) 등 백제의 영역 내
에 있는 나라들이다.
11)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 함안(咸安) 2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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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독바라기 2019.04.16 14:47

    백제의 거발성이 마치 현재 한국땅에 있듯이 서술한것은 왜놈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듯 하다, 국적이 어디신지요 ?,